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훈요 10조 (문단 편집) === 날조설 === 고려 태조가 정말로 훈요 10조를 직접 지었는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무엇보다 여덟째 항목은 당시 고려의 상황과 관련되어 여러 모순점이 보인다. 지역을 차별하는 훈요 10조를 두고 왕건이 당대에 지은 것이 아니라 후대에 조작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즉, 현종시대(1009-1031) 권력을 차지한 경주 최씨 집안에서 필요에 의해 제작됐다는 것. 기존에 권력 중심에 있던 후백제 세력을 견제하고 경주 지역 출신들이 권력을 잡기 위한 한 가지 근거로 삼고자 조작했다는 주장. 이런 추측에서 훈요 10조를 날조한 범인으로 지목하는 용의자는 바로 [[최제안]]과 [[최항(972)]] 그리고 [[현종(고려)|현종]]. 훈요 10조가 왕건의 유훈이었다면 왜 후대 왕들이 이를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았는지 의문스럽다는 것. 일례로 사찰 건립을 제한한 것을 지킨 왕들이 별로 없다는 점이 증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태조 왕건부터가 충청도 충주 출신 호족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전라도 나주 출신 왕무에게 기어코 왕위를 물려준 점이 그러하다. 만약 태조가 훈요를 직접 남겼다면 공주강 외(外)는 공주강 북쪽으로 해석이 되어야 마땅하다. 또한 고려사에 훈요 10조가 기재된 경위가 수상쩍다. 고려 현종 때 거란이 침입함에 따라 사초가 불타서 사라져 버려 고려사-태조편의 사초를 다시 기록할 때에야 최제안이 최항의 집에 있던 문서라면서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변조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서기 10세기 말 이후로 현재까지 훈요 10조로 전해지는 글은 최승로의 자손 최제안이 그의 사망 연도인 1046년 이전 최항의 집에서 발견한 것이다(고려사93 열전6 최승로). 어떤 왕에게 바쳐졌는지 알 수는 없으나 최제안은 현종·[[덕종(고려)|덕종]]·[[정종(고려 10대)|정종]]·문종 치세에 조정에 봉직하였던 인물이기 때문에, 시기상 현종의 정변에 의한 즉위를 구실로 침공을 받아, 개경이 약탈당한 거란의 두 번째 침공 이후 전후 복구 과정에서 문서가 다시 쓰였을 가능성이 크다. 최항이 난리(거란의 침입)를 겪은 3년 뒤 새로 짓는 국사 [[고려사]]의 감수국사를 맡아 적어넣었다는 점에서 의심이 가는 부분이다. 성종 대에 폐지시킨 팔관회를 독실한 불자인 최항이 현종 대에 다시 부활시킨 인물이라는 점에서 훈요 10조 팔관회 관련하여 더욱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더욱이 「훈요 10조」는 [[나주시|나주]] 출신의 왕무를 잘 보필하도록 당진의 면천 출신 박술희를 불러 이른 것으로 되어 있는데, 왕가도 아닌 최항의 집에 있었다는 기록은 믿기 어려운 대목이다. 5조 다섯 왕조를 비평한 최항로의 옹사에서도 여기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이 없다. 현종 즉위 직전까지 훈요 10조는 고려왕조 내에서 존재하지 않은 듯하다. 문종 대에 최유선이 흥왕사 건립을 반대할 때 언급했다지만 문종 역시 현종 이후 왕이다. 이 외에도 태조의 유훈이라며 등장하는 기록들을 보면 전부 현종 이후에 등장한다. 성종 대에 최승로가 불교에 대해 비판하며 심지어 광종의 친불교정책까지 비판하지만 여기서 최승로가 훈요 내지는 태조의 유훈을 언급한 적은 없다. 즉 현종 이후에 등장한 것으로 보이며, 설령 이전에 훈요가 존재했다 하더라도 원래 훈요가 5조만 있었는지 훈요7조인지 훈요10조인지 알 수 없고, 만약 있었다면 최항이 새로운 내용을 덧붙이거나 원래 내용을 바꾸었는지 여부도 확인할 길이 없다. 현종은 집권과정이 파란만장했던 왕이다. 태조 왕건의 적통인 [[목종(고려)|목종]]이 피살되고, [[사생아]] 출신인 현종이 즉위하였는데, 이는 거란 2차 침입의 명분이 되었다. 목종을 폐위시킨 [[강조(고려)|강조]]는 거란군에 의하여 사형을 당하였으며, 고려사(高麗史)에서도 반역열전에 실린 인물이다. 당연히 현종은 정통성이 취약하였으며 민심도 잃었으니 거란 침입시 피난길도 험난하였다. 집권과정도 험난했지만 특히 현종은 왕의 향리(鄕里) 즉 왕의 지역적 세력기반이 없었으므로 권력기반이 취약했다. 강조는 나이 어린 현종을 대신하여 1년여를 섭정하였으니 당대 최고의 실력자가 되었고, 신라계 최항은 현종 즉위 후 현종의 사부(師傅)로 임명되었으니 지금으로 치면 국정 자문역이다. 삼국사기에 김부식이 이르기를 '현종(顯宗)은 신라의 외손에서 나와 보위에 올랐으며 그 후의 왕통을 계승한 이는 모두 그의 자손이니 어찌 음덕(陰德)의 응보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신라계의 희망사항이 섞이기는 했지만 그만큼 현종은 신라계의 기대와 지지를 받는 왕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전라도 나주 출신 2대 혜종의 적통을 이어받은 왕이기도 하다. 중요한 점은 8대 현종을 기점으로 고려 왕실의 권력 기반이 3대 정종에서 7대 목종의 중요한 세력기반이던 충청도 충주 일대에서 바뀌게 된다. 즉 현종 때 최항이 훈요에 조작을 가했다 하더라도 3대 정종에서 7대 목종의 세력기반이던 충청도 극히 일부 지역을 견제할 목적 그 이상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는 격변을 거치며 왕위에 오른 현종의 정통성 즉 고려 왕실의 정통성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고려 왕실은 현종 이후 현종의 자손들로 후사가 이어지는데 현종은 그 정통성을 태조 왕건에 이어 2대 혜종으로부터 잇는다. 혜종의 모후 [[장화왕후]](莊和王后)는 전라도 나주 출신이며 태조 왕건에 이어 왕위에 오르는 [[왕무]](王武) 또한 전라도 나주 출신이다. 현종이 거란침입시 급박한 상황에서 전라도 나주로 몽진을 간 것은 그러한 연유이다. 현종이 팔관회를 부활시키면서 개최 장소에 개경, 서경에 이어 나주를 포함시킨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2대 혜종이 되는 왕무(王武)의 휘 무(武)는 고려조에서 피휘되었고[* 왕무의 휘에 사용된 신성한 글자이니 왕무 이외에는 쓸 수 없다.], 태조 왕건과 함께 혜종은 고려 왕실 종묘의 불천지주(不遷之主)에 오르게 되니 태조 왕건과 함께 전장을 누비며 적통을 이어받아 왕위에 오르고, 또한 현종은 그 정통성을 잇게 되니 그 위상은 감히 넘볼 수 없는 것이다. 고려 왕조 불천지주(不遷之主)는 태조, 혜종, 현종 오직 세 분 뿐이다. '''태조 왕건이 훈요를 남겼든지 또는 현종 대에 최항이 조작을 했든지 간에 두 경우 모두 공주강 외(外)는 공주강 북쪽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현종 측근 최항 조작설을 제기한 사람이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교수였던 일본인 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 龍)이지만, 또한 공주강 외(外)를 공주강 남쪽으로 억지스럽게 해석한 사람도 이마니시 류'''이다. 왜냐하면 이마니시 류는 차령산맥이 1903년에 새로 생긴 이름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차령산맥과 차현을 동일시하여 해석하려니까 공주강 외(外)를 억지스럽게 남쪽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만 이마니시 류는 그렇게 해석을 하면서도 '뭔가 이상한데…'라고 사족을 덧붙이기는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